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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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7년경에 태어나 서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로 경력을 쌓았다. 그는 로마의 도시 장관,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총독을 역임했고, 445년에는 귀족 칭호를 받았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황위에 올랐으나, 반달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다 살해당했다. 그의 짧은 통치는 75일 만에 끝났으며,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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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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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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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서방) | 서방 |
추가 정보 | (동방에서 인정받지 못함) |
통치 기간 | 455년 3월 17일 – 455년 5월 31일 |
섭정 | 마르키아누스 |
섭정 유형 | 동방 황제 |
이전 황제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다음 황제 | 아비투스 |
사망일 | 455년 5월 31일 (세) |
사망 장소 | 로마 |
배우자 | 에파르키아 루치나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
자녀 | 팔라디우스 |
아버지 | 아마도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 |
개인 정보 | |
이름 | 플라비우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출생 연도 | 396년경 |
사망 연도 | 455년 5월 31일 (58-59세) |
가계 | |
아버지 (추정) | Anicius Probinus |
어머니 | 마그나 |
자녀 | Palladius 아니키우스 프로부스 |
2. 초기 생애 및 경력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7년경에 태어났다.[1] 그는 아니키우스 가문과 페트로니우스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훗날 황제 올리브리우스와 연관되어 있었다. 막시무스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의 아들이었고, 아니키아 팔토니아 프로바와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의 손자였다. 그의 조부 프로부스는 364년에 일리리쿰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6년에 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8년부터 375년까지, 그리고 383년에 다시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을 역임했으며, 371년에 집정관이었다.[1]
막시무스는 이른 나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411년경 법무관을 역임했고,[2] 415년경에는 제국 관료제의 입문 직책이었던 ''호민관'' 겸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416년에서 419년 사이에는 ''황실 재정 장관''으로 근무했다. 420년 1월 또는 2월부터 421년 8월 또는 9월까지 로마의 ''도시 장관''을 역임하여 로마 시정 행정 대부분을 관할했다. 그는 439년 이전에 다시 이 직책을 맡았으며, 구 성 베드로 대성당 복원을 담당했다. 421년과 439년 사이에는 프라이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 직책을 맡고 있거나 두 번째 도시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433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439년 8월 28일부터 441년 3월 14일까지 이탈리아 프라이토리아 총독을 역임했으며,[13][14] 아니키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파우스투스가 그 직위를 승계했다. 443년에 두 번째 집정관직을 받았다. 445년에는 귀족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매우 소수의 사람에게만 제한된 제국 최고의 명예였다.[12] 같은 해, 그는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세 번째 집정관직을 맡기 전까지 비황제 로마인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443년과 445년 사이에 막시무스는 로마의 켈리안 언덕에 ''포룸 페트로니 막시미''(Forum Petronii Maximi)를 건설했다.[3]
2. 1. 출신 배경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7년경에 태어났다.[8] 그의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아니키우스 가문과 페트로니우스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 후일 황제 올리브리우스와 연관된 막시무스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의 아들이었고, 아니키아 팔토니아 프로바와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의 손자였다.[1] 프로부스는 364년에 일리리쿰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6년에 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8년부터 375년까지, 그리고 383년에 다시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이었으며, 371년에 집정관이었다.[1]막시무스는 젊은 나이부터 관료계에 진출하여 놀라운 초기 경력을 가졌다. 그의 가장 초기의 알려진 직책은 411년경에 역임한 법무관이었다.[2][11] 415년경에는 제국 관료제의 입문 직책이었던 ''tribunus'' et ''notarius''로 근무했으며, 이로 인해 416년에서 419년 사이에 ''comes sacrarum largitionum''(성스러운 기증의 백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2][11] 막시무스는 412년 또는 415년에 공공 경기에 4,000 금 리브라를 사용했다. 420년 1월 또는 2월부터 421년 8월 또는 9월까지 그는 로마의 ''praefectus urbi''를 역임하여 로마의 시정 행정 대부분에 대한 집행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439년 이전에 다시 이 직책을 맡았다. ''praefectus''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구 성 베드로 대성당의 복원을 맡았다.[12] 또한 그는 421년과 439년 사이에 군사 및 사법을 담당하는 주요 직책인 프라이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고 있거나 두 번째 도시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433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12] 집정관 직위를 얻는 것은 로마 국가에서 가장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439년 8월 28일부터 441년 3월 14일까지 막시무스는 서방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 및 사법 직책인 이탈리아 프라이토리아 총독을 역임했으며,[13][14] 아니키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파우스투스가 그 직위를 승계했다. 그는 443년에 두 번째 집정관직을 받았다. 445년에는 제국의 최고 명예 칭호인 귀족 칭호를 받았으며, 이는 매우 소수의 사람에게만 제한되었다.[12] 이 해에 그는 서방 제국의 총사령관 또는 ''magister militum''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세 번째 집정관직까지 비황제 로마인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443년과 445년 사이에 막시무스는 로마의 켈리안 언덕에 있는 비아 라비카나와 산 클레멘테 바실리카 사이에 ''포룸 페트로니 막시미''(Forum Petronii Maximi)를 건설했다.[3][12]
2. 2. 관직 진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6년경에 태어났다.[8] 그의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명문 아니키아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 그는 훗날 황제가 되는 올리브리우스와 친척 관계였으며, 그의 조부모는 371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와 아니키아 팔토니아 프로바였고, 아버지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였다. 그의 아버지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는 364년에 일리리쿰의 총독이 되었고, 366년에는 갈리아, 368년부터 375년에는 이탈리아의 민정 총독을 각각 역임했으며, 395년에 집정관에 취임했다.[1]막시무스는 젊은 나이에 관료 경력을 시작했다. 알려진 그의 첫 관직은 411년경에 취임한 법무관이었다.[2] 415년경에는 제국 관료의 등용문인 ''호민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416년부터 419년 사이에 ''황실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2] 420년 1월 또는 2월부터 421년 8월 또는 9월에 그는 수도 장관에 취임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리를 진행했으며, 439년 이전에 다시 이 관직을 맡았다. 421년부터 439년 사이에는 프라이토리아 총독에 임명되었고, 이 직책이나 두 번째 수도 장관 시기였던 43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2]
439년 8월부터 441년 2월까지 이탈리아 민정 총독을 역임했고,[13][14] 443년에 두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445년에는 파트리키(귀족)로 서임되었고, 같은 해 카엘리우스 언덕에 공공 광장을 건설했다.[3] 이 해 그는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지만, 다음 해에 아에티우스가 세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될 때까지였다.[11]
2. 3. 로마에서의 활동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6년경에 태어났다.[8] 그의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명문 아니키아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0] 후에 황제가 되는 올리브리우스와는 친척이며, 조부모는 371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와 아니키아 팔토니아 프로바, 아버지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였다. 그의 아버지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는 364년에 일리리쿰 총독이 되었고, 366년에는 갈리아, 368년부터 375년에는 이탈리아의 민정 총독을 각각 역임했으며, 395년에 집정관에 취임했다. 프로코피우스는 그가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J. B. 베리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 주장을 "믿을 수 없고 그럴듯하지 않다"고 여긴다.막시무스는 젊은 나이부터 관료계에 진출했으며, 알려진 첫 관직은 411년경에 취임한 법무관이었고,[2][11] 415년에는 제국 관료의 등용문인 호민관 소속 서기관/notariusla가 되었으며, 이어서 416년부터 419년 사이에 황실 재무 장관/comes sacrarum largitionumla을 역임했다.[11] 막시무스는 412년 또는 415년에 공공 경기에 4,000 금 리브라를 사용했다.
420년 1월/2월부터 421년 8월/9월에 그는 수도 장관에 취임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리를 진행했으며, 439년 이전에 그는 다시 이 직책을 맡았다. 게다가 그는 421년부터 439년 사이 언젠가 프라이토리아 총독에 임명되었고, 이 관직이나 두 번째 수도 장관 시기였던 43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 집정관 직위를 얻는 것은 로마 국가에서 가장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439년 8월 28일부터 441년 3월 14일까지 이탈리아 민정 총독을 역임했고,[13][14] 그 후 443년에 두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445년에 파트리키(귀족)로 서임되었고, 이 해까지 비아 라비카나와 성 클레멘테 성당 사이의 카엘리우스 언덕에 공공 광장/Forum Petronii Maximila을 건설했다.[3][12] 이 해 그는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 해에 군무 장관 아에티우스가 세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될 때까지였다.[11]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아에티우스 장군과의 불화가 서로마 제국에 잇따라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15] 하지만, 처음에는 이 재앙으로 가장 이익을 얻은 것은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였으며, 454년에 아에티우스가, 이어서 다음 해인 455년 3월 16일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면서, 그가 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11]
2. 4. 고위 관료로서의 성장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6년경[8] 또는 397년에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명문 아니키우스 가문과 페트로니우스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10] 후에 황제가 되는 올리브리우스와는 친척이며, 조부모는 371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와 아니키아 팔토니아 프로바, 아버지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였다. 프로부스는 364년에 일리리쿰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6년에 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 368년부터 375년까지, 그리고 383년에 다시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지방 장관이었으며, 371년에 집정관이었다.[1] 프로코피우스는 그가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J. B. 베리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 주장을 "믿을 수 없고 그럴듯하지 않다"고 여긴다.막시무스는 젊은 나이부터 관료계에 진출했으며, 놀라운 초기 경력을 가졌다. 알려진 첫 관직은 411년경에 취임한 법무관이었고,[2][11] 415년에는 제국 관료의 등용문인 호민관 소속 서기관/notariusla가 되었으며, 이어서 416년부터 419년 사이에 황실 재무 장관/Comes sacrarum largitionumla을 역임했다.[11] 막시무스는 412년 또는 415년에 공공 경기에 4,000 금 리브라를 사용했다. 420년 1월 또는 2월부터 421년 8월 또는 9월까지 그는 로마의 수도 장관/praefectus urbila에 취임하여 로마의 시정 행정 대부분에 대한 집행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리를 진행했으며, 439년 이전에 다시 이 관직을 맡았다. 게다가 그는 421년부터 439년 사이 언젠가 근위군단장관에 임명되었고, 이 관직이나 두 번째 수도 장관 시기였던 43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2] 집정관 직위를 얻는 것은 로마 국가에서 가장 높은 영예로 여겨졌다.
439년 8월 28일부터 441년 3월 14일까지 막시무스는 이탈리아 프라이토리아 총독을 역임했고,[13][14] 그 후 443년에 두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445년에는 파트리키(귀족)로 서임되었고, 이 해까지 라비카나 가도와 성 클레멘테 성당/산 클레멘테 알 라테라노 성당la 사이의 카엘리우스 언덕에 공공 광장을 건설했다.[12] 이 해 그는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 해에 군무 장관 아에티우스가 세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될 때까지였다.[11]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유력자 아에티우스 장군과의 불화가 서로마 제국에 잇따라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15]
3.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과 막시무스의 즉위
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아에티우스를 제거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454년 9월 21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회의 중에 자신의 손으로 아에티우스를 살해했다.[4][18][19] 이는 막시무스가 황제의 마음을 독살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려 한 계략이었다.[4]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막시무스는 도박을 하였고, 막시무스가 돈을 걸었으나 결국 게임에서 졌다.[17] 돈이 없었던 막시무스는 부채를 보증하기 위해 반지를 남겼다.[17] 발렌티니아누스는 그 반지를 사용하여 막시무스의 아내 루치나를 궁정으로 소환했다.[17] 루치나는 남편에게 소환된 것으로 믿고 궁정에 갔지만, 발렌티니아누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고, 황제는 그녀를 강간했다.[17] 집에 돌아온 루치나는 막시무스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막시무스는 복수를 맹세했다.[17]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가 살아있는 한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에티우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11] 그는 황제의 환관이자 ''primicerius sacri cubiculi''인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었다.[11]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오랫동안 장군을 반대해왔다. 그들은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에티우스가 황제를 암살하려 한다고 설득하여 아에티우스를 살해하도록 만들었다.
아에티우스가 죽은 후,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에티우스의 비어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자리를 요구했지만, 황제는 거절했다.[20]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아에티우스가 휘둘렀던 권력을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에 분개한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11] 그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싸웠고, 장군의 죽음 이후 발렌티니아누스의 호위병으로 임명된 두 명의 스키타이인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를 공범자로 선택했다.[11]
막시무스는 그들에게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책임자이며, 복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보상을 약속했다.[21]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는 마르스 광장으로 갔고, 옵틸리아는 그의 관자놀이를 찔렀다.[11] 발렌티니아누스가 공격자를 돌아보자 옵틸리아는 칼날로 그를 다시 찔러 죽였다. 동시에 트라우스틸라는 헤라클리우스를 살해했다. 두 스키타이는 황제의 왕관과 로브를 가져와 막시무스에게 가져갔다.[11]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왕위에 대한 분명한 후계자 없이 남겨졌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으며, 군대의 지지는 세 명의 주요 후보자 사이에서 나뉘었다.[11] 아에티우스의 전 ''domesticus''(보디가드)였던 막시미아누스,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지지를 받은 미래의 황제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막시무스 자신이었다.[11] 막시무스는 3월 17일 황궁의 관리들에게 돈을 뿌려 왕위를 확보했다.[11]
3. 1. 아에티우스와의 갈등
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아에티우스를 제거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454년 9월 21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회의 중에 자신의 손으로 아에티우스를 살해했다.[4][18][19] 이는 막시무스가 황제의 마음을 독살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려 한 계략이었다.[4]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막시무스는 도박을 하였고, 막시무스가 돈을 걸었으나 결국 게임에서 졌다.[17] 돈이 없었던 막시무스는 부채를 보증하기 위해 반지를 남겼다.[17] 발렌티니아누스는 그 반지를 사용하여 막시무스의 아내 루치나를 궁정으로 소환했다.[17] 루치나는 남편에게 소환된 것으로 믿고 궁정에 갔지만, 발렌티니아누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고, 황제는 그녀를 강간했다.[17] 집에 돌아온 루치나는 막시무스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막시무스는 복수를 맹세했다.[17]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가 살아있는 한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에티우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11] 그는 황제의 환관이자 ''primicerius sacri cubiculi''인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었다.[11]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오랫동안 장군을 반대해왔다. 그들은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에티우스가 황제를 암살하려 한다고 설득하여 아에티우스를 살해하도록 만들었다.
아에티우스가 죽은 후,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에티우스의 비어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자리를 요구했지만, 황제는 거절했다.[20]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아에티우스가 휘둘렀던 권력을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에 분개한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11] 그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싸웠고, 장군의 죽음 이후 발렌티니아누스의 호위병으로 임명된 두 명의 스키타이인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를 공범자로 선택했다.[11]
막시무스는 그들에게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책임자이며, 복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보상을 약속했다.[21]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는 마르스 광장으로 갔고, 옵틸리아는 그의 관자놀이를 찔렀다.[11] 발렌티니아누스가 공격자를 돌아보자 옵틸리아는 칼날로 그를 다시 찔러 죽였다. 동시에 트라우스틸라는 헤라클리우스를 살해했다. 두 스키타이는 황제의 왕관과 로브를 가져와 막시무스에게 가져갔다.[11]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왕위에 대한 분명한 후계자 없이 남겨졌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으며, 군대의 지지는 세 명의 주요 후보자 사이에서 나뉘었다.[11] 아에티우스의 전 ''domesticus''(보디가드)였던 막시미아누스,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지지를 받은 미래의 황제 마요리안,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막시무스 자신이었다.[11] 막시무스는 3월 17일 황궁의 관리들에게 돈을 뿌려 왕위를 확보했다.[11]
3. 2.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사건
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를 향한 황제의 의심을 부추겨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그를 살해하게 만들었다.[4]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막시무스는 내기를 했고, 막시무스가 졌다. 돈이 없었던 막시무스는 반지를 담보로 맡겼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그 반지를 사용하여 막시무스의 아내 루치나를 궁정으로 불렀다. 루치나는 남편에게 소환된 것으로 알고 궁정으로 갔지만, 발렌티니아누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황제는 강제로 그녀를 범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막시무스에게 배신당했다고 비난하며, 그가 자신을 황제에게 넘겨주었다고 믿었다. 막시무스는 복수를 맹세했고, 발렌티니아누스를 상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가 살아있는 한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에티우스를 제거해야 했다. 그는 황제에 대해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환관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454년 9월 21일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에티우스가 그를 암살하려 한다고 설득하여 회의 중에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자신의 손으로, 헤라클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죽이도록 했다.

아에티우스가 죽자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에게 그의 직책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거절했다.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아에티우스가 휘둘렀던 권력을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가 그를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매우 화가 나서 발렌티니아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싸웠고, 장군의 죽음 이후 발렌티니아누스의 호위병으로 임명된 두 명의 스키타이인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를 공범자로 선택했다.
막시무스는 그들에게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책임자이며, 두 군인이 옛 사령관에게 복수해야 하며, 동시에 황제를 배신하는 데 대한 보상을 약속한다고 설득했다. 455년 3월 16일 로마에 있던 발렌티니아누스는 경비병 몇 명과 함께 마르스 광장으로 갔고, 옵틸리아, 트라우스틸라와 그의 부하들이 동행했다. 황제가 활을 쏘기 위해 하차하자마자 옵틸리아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다가와 그의 관자놀이를 찔렀다. 발렌티니아누스가 공격자를 돌아보자 옵틸리아는 칼날로 그를 다시 찔러 죽였다. 동시에 트라우스틸라는 헤라클리우스를 살해했다. 두 명의 스키타이는 황제의 왕관과 로브를 가져와 막시무스에게 가져갔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왕위에 대한 분명한 후계자가 없었다. 여러 후보들이 제국의 관료와 군대의 다양한 그룹에 의해 지지받았다. 특히 군대의 지지는 세 명의 주요 후보자 사이에서 나뉘었다. 아에티우스의 전 ''domesticus''(보디가드)였던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부유해진 돔니누스라는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었고, 아에티우스가 죽은 후 군대를 지휘했고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지지를 받은 미래의 황제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고 3월 17일 황궁의 관리들에게 돈을 뿌려 왕위를 확보한 막시무스 자신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막시무스 황제의 두 황후가 되었다.
3. 3. 제위 찬탈과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의 결혼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이후, 서로마 제국은 유력한 황위 계승자가 없어 혼란에 빠졌다. 군대는 세 명의 후보, 막시미아누스,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막시무스로 분열되었다.[11] 이 중 막시무스는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으며, 황궁 관리들에게 뇌물을 뿌려 455년 3월 17일 황제 자리에 올랐다.[11]안티오크의 요한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아에티우스를 살해하도록 사주했고, 황제는 실제로 아에티우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4][16]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막시무스는 내기를 했고, 막시무스는 자신의 반지를 담보로 잡혔다.[17]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 반지를 이용해 막시무스의 아내 루키니아를 궁으로 불러들여 강간했다.[17] 막시무스는 복수를 맹세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17]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가 살아있는 한 복수할 수 없다고 판단,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아에티우스를 제거했다.[11] 아에티우스 사후,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군무장관 자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20] 이에 분노한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기로 결심, 옵티라와 트라우스틸라를 포섭하여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했다.[11]
4. 짧은 통치와 비극적 최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왕궁을 장악한 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했다.[20] 에우독시아는 남편의 암살에 막시무스가 관여했다고 의심하여 마지못해 결혼을 받아들였다.[22]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제국은 그의 즉위를 승인하지 않았다.[23] 막시무스는 아비투스를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여 툴루즈로 보내 서고트족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23][24] 또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 에우독키아와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를 결혼시켰다.
막시무스는 생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와 맺었던 에우도키아와 반달 왕자 후네리크의 약혼을 파기했는데,[25] 절망한 에우독시아가 반달 궁정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가이세리크에게 이탈리아 침공의 구실을 주었다.[26] 막시무스 황제가 즉위한 지 2개월이 지난 5월, 가이세리크가 이탈리아로 출항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주민 대부분이 도망치기 시작했다.[11] 막시무스 황제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27] 아비투스가 이끌고 올 서고트족의 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황제는 반달족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도망을 시도했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재촉했다.[27] 하지만 혼란 속에서 막시무스 황제는 호위병과 측근들에게 버려졌다.[11]
455년 5월 31일, 거리로 나선 막시무스 황제는 격분한 군중에게 막혀 돌을 맞아 사망했다.[28] 그의 시신은 토막 나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11][29] 그의 재위는 불과 75일이었다. 부제(카이사르)로 임명되었던 황자 팔라디우스도 아마 처형되었을 것이다.[30] 막시무스 황제의 죽음 이틀 후인 6월 2일,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했다.[9]
카를 브률로프 그림, 1833년 - 1836년
4. 1. 반달족의 침입 위협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왕궁을 장악한 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했다.[20] 에우독시아는 남편의 암살에 막시무스가 관여했다고 의심하여 마지못해 결혼을 받아들였다.[22]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제국은 그의 즉위를 승인하지 않았다.[23] 막시무스는 아비투스를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여 툴루즈로 보내 서고트족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23][24] 또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녀 에우도키아와 자신의 아들 팔라디우스를 결혼시켰다.막시무스는 생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와 맺었던 에우도키아와 반달 왕자 후네리크의 약혼을 파기했는데,[25] 절망한 에우독시아가 반달 궁정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가이세리크에게 이탈리아 침공의 구실을 주었다.[26] 막시무스 황제가 즉위한 지 2개월이 지난 5월, 가이세리크가 이탈리아로 출항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주민 대부분이 도망치기 시작했다.[11] 막시무스 황제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27] 아비투스가 이끌고 올 서고트족의 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황제는 반달족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도망을 시도했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재촉했다.[27] 하지만 혼란 속에서 막시무스 황제는 호위병과 측근들에게 버려졌다.[11]
455년 5월 31일, 거리로 나선 막시무스 황제는 격분한 군중에게 막혀 돌을 맞아 사망했다.[28] 그의 시신은 토막 나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11][29] 그의 재위는 불과 75일이었다. 부제(카이사르)로 임명되었던 황자 팔라디우스도 아마 처형되었을 것이다.[30] 막시무스 황제의 죽음 이틀 후인 6월 2일,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했다.[9]
4. 2. 로마 시민들의 동요와 막시무스의 죽음
455년 5월,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이탈리아로 항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11] 많은 로마 시민들이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는 아비투스가 툴루즈에서 서고트족의 지원을 받기위해 파견 나갔기 때문에, 반달족에 맞서 방어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23][24] 그래서 그는 탈출을 조직하려 했고, 원로원에게 자신과 함께 갈 것을 촉구했다.[27] 그러나 공황 상태에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그의 경호원과 수행원들에게 버려져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11]막시무스가 455년 5월 31일 혼자 도시를 떠나려 하자 분노한 군중이 그를 공격하여 돌로 쳐 죽였다.[28] 다른 기록에는 "우르수스라는 로마 병사"가 그를 살해했다고도 한다.[28]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11][29] 그는 단 75일 동안 통치했다. 그의 아들 팔라디우스는 카이사르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30]
막시무스 황제의 죽음 이틀 후인 6월 2일, 가이세리크는 로마 시내로 들어가 2주 동안 약탈을 자행했다.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간청에 따라 도시 약탈의 일반적인 방화, 학대, 살인은 자제했지만, 가이세리크는 엄청난 양의 약탈품과 함께 황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황녀 에우독키아, 플라키디아/Placidia영어를 데리고 도시를 떠났다.[9]
4. 3. 반달족의 로마 약탈
455년 6월 2일,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사망하고 3일 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2주 동안 약탈했다.[5]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간청으로 반달족은 방화, 고문, 살인을 자제했다고 전해진다.[9] 하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신전, 공공 건물, 개인 주택, 심지어 황제의 궁전까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며, 반달족이 많은 로마인들을 노예로 끌고 가고 예술 작품을 파괴했으며, 다수의 시민을 살해했다고 한다. 약탈 당시 반달족의 행위는 현대 용어인 반달리즘의 기원이 되었다.[5]
가이세리크는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딸 플라키디아와 에우도키아를 포로로 데려갔다.[9][5]
5. 평가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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